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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재 목사을 추억하며 김도윤글

  • 김도윤
  • 조회 : 1348
  • 2015.04.27 오후 06:46

김도윤 글

 

 

(1) 존경하는 주님의 참된종 이인재 목사님을 기억속에서 떠올려봅니다

 

서울 신당동에 세워진 성산교회

 

지금 내나이 칠십을 훌쩍 넘은 나이에 열 살 때 일부터 이인재 목사님에 대한 글을 쓰려고하니 성산교회 초대 당회장이셨던 이인재 목사님 삶의 무엇부터 써야할찌 ?

한마디로 말을 주리면 한번 살고가는 인생길 주님 뜻대로 사시다가 이인재 목사님은 천국으로 가셨다. 감히 제가 글로 옮기기에는 제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 책임감도느끼고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또 우리 주님의 명령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 속 깊이 간직해두었던 이인재 목사님의 사연들을 종목 종목을 글로 쓰려고 한다.

 

(2) ? 성산교회가 설립되었나?

 

가 워낙 어린시절때일이라 기억나는 부분만이라도 분명하게쓰려고한다. 우리 가족은 원래 평양이고향이고 나도 물론 평양에서 에태여났으며 8살까지는 평양에서 살았던 평양 본토바기이다. 평양 시내중심지 높은 언덕 위에 산정현교회가 있었고 우리 교회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님을 당회장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던 교회였으며 우리 부모님 역시 산정현교회 교인이셨다.

산정현교회 본당 앞에서 낮은 곳을 멀리쳐다보면 한눈에 대동강이 멀리 보인다. 찬송가 가사에 있는것처럼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고운 대동강물 찬송가가 절로나올만큼 아름다은곳이 평양이다 에메랄드 빛갈의 푸르고 맑은 대동강물은 남남 북녀라는 말이 있듯이 평양에 미인이 많이 태어날 수 있는 조건에 하나이다 라는 말도있다

악독한 일본치하에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투사와 같이 주님을 믿는 절개를 지키며 나라를 되찾으려고 일본 이름으로 고치지 않은 교인이 있었는데 나의 아버님도 그 중 한분이다 . 나의 아버님은 해방 후에도 일본 사람이라면 치가 떨린다고 하셨다. 일본놈들하고 대항을 하시며 싸우시며 오랜 세월 옥살이를 하시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을 잃고, 교인들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잃은 것같이 슬픈에 잠겨 있을 때 815일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신 한상동 목사님을 당회장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오랜 세월 옥거를 치르신뒤라 너무 허약하셨기 때문에 남쪽 고향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조금 쉬고싶다고 하시면서 사양하셨다고 한다

사양하실 때 산정현 교회 제직들이 너무 속상해서 목사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한대 때리고 싶다고까지 했었다는 말까지 있다.

그 시절 이인재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신학생으로 주기철 목사님 감옥에 들어가시면서 때때로 산정현교회 주일 낮설교, 저녁 설교,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를 하셨는데 어느날 이인재 전도사님도 일본놈들의 의해 끌려가 감옥생활이 시작되고 오래 고생하시다가 해방과 함께 감옥생활을 면하게 되셨다. 그 시절 어떤 분은 이인재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고, 또 어떤 분은 이선생님이라고 불럿다고 한다.

그때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국의 도음을 받게 되어 우리나라는 북쪽은 빨지산 출신들이 들이 정치에 간섭하면서 토지개혁을 했고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또다시 교인들을 잡아가는 일이 빈번해져가고 있어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어지는 북한땅이 되어가고, 나라는 두 동강이로 갈라져서 38선이 생기게 되어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목자를 잃은 양무리가 되어 교회 안에는 의견 충돌 끝에 싸움을 하게 되어 산정현 교회 역시도 둘로 갈라졌다. 언제나 싸음에는 선과 악이 있게 마련인데 악한 쪽은 교회건물을 차지하고, 선한 쪽은 목장을 경영하고 있던 교인 남자 집사 박덕술 집사님의 소 외양간으로 나오게 되여 산정현교회 역시 두동강이가 되었다.

교인들은 목자를 잃은 것도 너무 슬프고 괴로운데 교회 건물까지 빼았겼으니 앞날이 캄캄한 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목자를 읽은 양들은 한가족 한가족이 남쪽으로 신앙의 자유와 삶에 자유가 있는 남쪽으로가야만 살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38선을 넘게되었다. 막상 남쪽 서울에 몇몇의 산정현교회 교회 건물울 양보하고 소외양간으로 나왔던 제직 몇분이 모여 우선 주일이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해서 서울 신당동에 성산교회를 설립하였다.

성산교회는 이름은 성산으로 지었지만 내막으로는 평양 산정현교회가 남으로 이동해 왔다고 할만큼 평양에서 38선을 넘어 피란을 온 교인이 80% 정도가 되었다.

평양 산정현 교회 교인들은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믿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동시에 애국자들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며 우리들의 믿음을 잘 인도해 주실 분을 찿던 중 이인재 조사님은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감옥에서 고생을 하셨던 분이어서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해서 담임 교역자로 결정을 하였다.

이인재 목사님은 그 시절에는 이인재 조사님이라고 우리는 불렀다. 성산 교회 예배당 건물은 적산집 (일본 사람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집)이었다.

아주 큰 집, 평양에서 산정현교회 여자 집사님이셨던 송소영 집사님의 집이었다. 아래 층에는 집주인 가 족, 그리고 한쪽에 이인재 조사님 가족이 부엌, 그리고 방 2개또는 3개를 쓰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주일이 되면 사선을 넘어온 교인들이 만날 때마다 무척 반가운 얼굴들이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안다. 우리는 서로가 언제, 또 어떤 방법으로 38선을 넘었는가를 물으며 교회에서 만나면 헤어지기가 싫어서 때로는 저녁 예배까지 드리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데 38선 북쪽에 가족을 남져 두고, 홀로 남자만 넘어 온 교인이 많았다.

남자 교인이 월등하게 많았으며 창립 첫 주는 약 70명의 교인이었으나 낮 예배 후 젊은 주일학교 선생님들, 성가대원, 제직들도. 큰 북을 메고 약 20명 교인이 한 팀이 되어 한주도 빼놓치 않고 큰 길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여 교인은 매주 많이늘어 일년이 되지 않아서 약 200명 정도의 교인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교회 부흥은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 있는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믿는 사람들아 군병같으니..’

피란처 있으니 활란을 당하자 ……

주 예수를 믿으라며 외치던 소리가 아직도 쟁쟁하게 들려 오는 것같다.

열심히 찬송을 부르던 기억이 떠오른다.

 

(3) 미국선교사

 

주일마나 평양에서 38선을 넘어온 새 교인은 물론이고 미국 선교사 한부선, 최희선, 말스베리, 권세열 등이 가끔씩 성산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권세열 선교사는 아들이 지금 서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때 교인으로는 조만식 장로님 큰 딸 가족 중 조선부(조만식 장로 장녀) 집사님이 올겐 반주를 했었다.

성산교회에는 주일마다 미국 선교사가 많이 왔다. 이들 역시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으로 38선을 넘어온 분들이였다. 매주 다섯 분 이상의 선교사가 예배를 드리곤 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쯤은 미국선교사가 설교를 하던 생각이 난다.

이름도 모두 한국말로 지였지만 한국말을 참 잘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한부선 (미국선교사)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콩나물 대가리는 녹두나물 대가리보다 커요..”

무슨 말을 하다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모르겠다. 나는 칠십살이 흘쩍넘은 내 나이에도 열 살 때 일을 머리 속 깊이 간직해 놓았던 말을 꺼내서 요즘도 수퍼마겟에 가서 장을 볼때면 콩나물대가리가 녹두 나물 대가리보다 커요하면서 나는 혼자말로 중얼거려 보기도 한다.

그리고는 한부선 목사님은 내가 45세 때, 내가 다니고 있는 뉴욕 제일장로교회에서 한번 만나보았다. 그때 잠시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주일학교 학생 때 목사님을 우리 교회서 보았어요한부선 목사님께서 서울 어느교회요?”. “신당동 성산교회에서요했더니 그랬구만 이인재 목사님 필라델피아서 살고 있지하시길래 저도 가끔 만나요했더니 그렇구만 하면서 세상은 참으로 좁아요하셨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그시절 미국선교사님들의 얼굴이 한분 한분이 내 머리 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4) 성산교회 주일학교 예배시간

 

주일학교 성가대는 15명 정도였고 주일학교 학생은 내 기억으로는 약 100명이 조금 넘었던 것같다. 담임은 안영준 선생님이었다. 그 외에 반사가 약 20명쯤 되었다. 교회 안이 마루로 되어 있어서 예배를 드리려면 신발을 벗고, 신발장에 넣고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한 주에 몇 명은 신발을 잊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 신발을 잊어버린 아이들은 엉엉 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매주 그런 일이 되풀이 되기 때문에 그 일도 참 힘든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발 주머니를 각자가 가자고 신발을 담아 가지고 들고 다니다 보니, 혹시 잠시 놓아두면 역시 훔쳐 가는 일이 번번이 생겼다. 그때 나의 아버님이 주일하교 부장이셨는데 신발을 한짝은 신발장에 놓아 두고, 한짝만 신발 주머니에 담아가지고 다니라고 하셨다. 도둑놈도 한 짝은 가져가지 않아 그 후부터 신발도둑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5) 박인순 선생님 (여자 전도사님 )

 

박인순 선생님이라고 우리는 불렀다. 이분 역시 일본놈에 의해 잡혀가 핍박을 받은 분이라고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잡아다 때리고 머리를 군화로 밟아 해골까지 깨져 기절을 했는지 죽었는지를 몰라 시궁창에 버렸는데 하늘에서 빛이는 밝은 빛을 보며 깨어났다고 어린시절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박인순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해골이 깨졌었기대문에 얼굴이 조금 삐뚤려져서 보기가 조금 그랬다.

박인순 선생님 역시 생명을 걸고 걸어온 신앙의 투사였다. 아주 열심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신,구약을 일주에 완독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시절 신구약 완독커녕 겨우 주기도문을 겨우 외을 정도였다.

일주간 박인순 선생님은 주일학교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우리 모두 철야기도회로 인도하셨다. 그때 일주일 동안 어린초등학교 학생들이 약 80% 가 사도신경을 외었다.

그런데 그때 나 바로 위의 오빠가 십계명을 외워 성경외우기 경년대회에서 일등을 했다 그리고 2일후 그때 한참 유행하던 병 뇌염에 걸려 48시간만에 천국으로 갔다.

그 때 우리 가족이 38선을 넘어온 지 일년이 되는 날에 오빠가 천국에 갔다. 힘든 삶 속에서 슬픔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 가족을 위해 이인재 조사님이 관을 사가지고 오셔서 장례식을 해주셨다고 내가 제법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되었다.

교인을 사랑하시기를 목사님 가족보다 더욱 사랑하셨던 이인재 목사님 존경하고 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잊지 않고 하루 하루 살고 있습니다. 천국 주님 곁에서 편히 쉬소서!’

 

(6) 손양원 목사님의 두명의 아들 천국으로 가다

 

내가 성산교회를 다닐 때 제일 놀라은 사건이었다. 손양원 목사남은 때대로 성산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도 인도 하셨기 때문에 우리 주일학교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목사님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집에서 이른 아침 내가 잠이 깰 무렵.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보통때보다 심상치 않은 웅성 웅성 하는소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아버님은 신문을 들고 계셨고, 옆에는 어머니와 오빠들이 손양원 목사님 두아들 빨갱이가 죽였다고 신문 기사에 났다고 하시며 슬픈 기색이 보였다. 다음 날, 교회에 가니 교회 교인들은 모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 후 얼마간 그 빨갱이 총살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얼마 후 신문에 손양원 목사님께서 그 빨갱이를 아들을 삼겠다고 감옥에 있는 안재선을 손양원 목사님께로 돌려 보내달라고 했다고 신문에 났다고 야단들이다.

그 후 몇 주 후부터 안재선은 우리 성산교회에 안영준 선생님이 데리고 오는 것이다. 안재선은 교회에 오면 강대상 앞에 엎드려 있었다. 옷은 다 떨어지고 구두 역시 너덜너덜 양말을 신기는 했으나 구멍이 나서 발바닥이 전부 보이고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밤송이 갔았다.

새옷과 새신발을 사주어도 받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는 죄인이라고 ……..

매주 교회에오면 강대상 앞자리에 엎드려 있다가 돌아갈 때는 땅만 쳐다 보... 다른 사람 얼굴을 쳐다 보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주일학생들은 줄~~ 따라 다니며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나는 안재선을 쳐다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손양원 목사님은 참으로 훌륭한 주님의 종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여순사건에는 나의 친정 어머니 남동생 그러니까 나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외삼촌은 육군 군의관(치과의사)이었다. 서울에서 출장으로 15일간 여수로 갔었는데 돌아오기 전 날 짐을 꾸리고있는데 같은 군의관대위가 같이 출장길에 올랐던 분이 자기 부인이 산달인데 오늘 아기를 낳을지, 내일 낳을지 한다고 하니 나의 외삼촌이 그럼 내가 몇일 더 있을 터이니 친구 의사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친구를 먼저 보내고 그 다음날 여순사건으로 나의 외삼촌은 빨갱이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친구 대신 교대하게 된이야기는 다른 군의관이 전해 주어 알게 되었다.

나의 외숙모는 일평생 자식 넷을 키우느라고 고생 많이 하시는 것을 보면서, 외숙모를 볼때마다 빨갱이들 참으로 한심하고 머리가 부족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며 외숙모 가족을 향해 가슴이 짠했다

<여순사건>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 크고 아픈 상처라는 생각이 든다.

 

(7) 안영준 선생님 (안영준목사님)

 

안영준 선생님은 안재선 을 늘 데리고 다니셨다. 어린 시절, 나는 안영준 선생님의 딸도 우리 성가반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나는 안영준 선생님이 무었을 하시던 분인지 전혀 모른다.

우리 성산교회 성가반 단임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쓰신 분이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은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이 빨갱이 손에 희생되었다는 줄거리가 주로 쓰여져 있는 책이다. 안영준 선생님은 나중에 목사님이 되셨다는 말을 어른들에게 듣게 되어 알았다. 안영준 목사님은 금테 안경을 쓰고 다녔으며, 키는 크고 어린나이에도 제법 잘 생긴 외국 사람처럼 생긴 선생님이었다.

 

(8) 성산교회에서 열 살 때 내가 보았던 이인재 목사님

 

나는 초등하교 2학년 때로 기억이 난다. 늑막염으로 학교를 약 한 달간 결석을 하고 집에 누어있을 때 이인재 조사님은 일주일에 한번씩 꼭 오셔서 기도를 해 주시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에도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조사님이 다녀가시면 힘이 더 나는 것 같았고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도 교회에서 마주치면 있지 않으시고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밥 많이 먹고 건강해라 그리고 기도 항상 해야 된다하셨다.

그 시절, 이인재 조사님은 주일날은 여름철에는 흰색 모시 바지 저고리 모시 두루마기 입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일날 낮예배 설교가 끝나면 뒤에 현관에서 교인들 하고 인사를 나누실때면 조사님의 모습은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은 것처럼 땀에 흠뻑 젖어 흰색 모시 저고리와 두루마기가 몸에 붙어 있어서 내가 어린 나이에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풍기와 에어콘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빨리 겨울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날씨가 너무 더워서 조사님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때로는 평일에도 뜰에서 친구들하고 뛰며 숨박꼭질을 할때면 숨으려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강대상밑에 이인재 조사님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는 훤하게 보이는 것 같다. 설교를 하시기 전에도 강대상 밑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계시던 모습을 보면서, 의자에 앉으 계셨으면 좋을 터인데 다리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지금도 그때 이인재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요즘도 고개가 숙여진다.

어린 주일학교 학생 하나 하나를 소홀하게 대하지 않으셨고, 마주쳐 인사하면서 꼭 머리를 쓰다 듬어 주시면서 이름을 기억하시고 건강해야 해말씀하셨다.

부모가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주일학생까지 이름을 거의 다 알고 계셨고, 혹시 모르는 아이는 이름을 물어보고 가족사항을 물으면서 수첩에 꼼꼼히 기록하시던 일이 기억 난다.

나의 어머님께서는 주일날 예배를후 집으로 돌아 올때면 이인재 조사님은 진짜 주님의 종이다. 얼굴을 보아라 언제나 겸손한 모습 진짜야 진짜!” 그렇게 계속하시던 말씀하시던 어머니 모습도 선하게 떠오른다.

나도 모태 신앙으로 여러 목사님을 알고 겪어 보았지만 성직자의 참된 모습과 삶이 이인재 목사님보다 훌륭한 목사님을 거의 본적이 없다.

우리는 청량리에 살면서 신당동까지 다녔기 때문에 주일학교 예배가 끝나면 나는 어머니 옆에서 대예배를 드리곤 했다. 이인재 목사님의 설교는 주일마다 들을 수 있었기에 아직도 목사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내 눈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이인재 목사님은 설교 도중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겠어요. 은혜를 받으려면 성수주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합니다. 전차표도 주일날은 사지 말고 토요일에 미리사세요. 주일날 서울운동장에 축구 구경가면 안돼요. 주일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수주일을 해야 됩니다.”

그때 성산교회에는 유명 축구선수 여섯 가족 이상 교인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지금도 기억에있는 선수이름은 민병대선수다. 그는 아주 유명한 선수였다.

어쩌다가 한 두 교인이 주일날 축구장에 다녀온 것이 목사님 귀에 들어가면 그 다음 주일은 온교인들을향하여 강대상을 주목이 깨여질 정도로 내려치셨고, 조사님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 올랐었고, 두 발은 깡충 깡충 뛰시면서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듯 했다.

우리나라가 이 모양인데 주일날 기도해야지 축구구경은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목사님 말씀을 ? 성도들이 순종하지 않고 야단들을 맞고 있는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인재 목사남을 또 한분의 아버님 같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간다.

 

(9) 이인재 목사님의 부인(사모님)

사모님 (신상이)님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해 두었던 모습을 떠 올려본다. 사모님은 키가 컸고, 아주 늘씬한 몸매를 갖이셨던 분이셨다. 목은 약간 길어 소나무 위에 서있는 학을 보는 듯했고, 피부는 아주 희고 깨끗했으며, 머리카락은 아주 검은색이었다. 머리카락을 길러 쪽을 지셨던 사모님으로 나는 기억한다. 예배시간에는 언제나 제일 뒤에서 어느 한구석에서 꿇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는 집으로 내려가셨다. 주일날 나와 잠시 마주치면 밥 먹을래”. 우리 가족은 멀리서 온다고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사모님, 철없는 도윤이는 시카고에, 그리고 인덕이는 워싱턴씨티에 살고 있습니다”.

성탄 밤, 새벽 2시쯤으로 생각이 든다. 우리 두 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 가셔서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재워 주시고 아침까지 먹여주셨던 일을 저는 일평생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고마움과 사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저도 그 모습을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사모님 보고 싶습니다. 사모님 사랑합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사모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조용한 분인 것으로 기억을 한다.

 

// 38선을 넘어와 교인들과 함께 가난 속에서 힘들게 같이 고생을 겪으시며 사시다가 천국으로 가신 사모님(신상이) 천국에서 편히쉬소서//

(10) 성산교회 삼각산 기도회

 

나는 워낙 어린 나이여서 삼각산 기도원에는 한번도 참석을 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성산교회는 약 3개월에 한번씩은 제직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교인들도 삼각산 기도하러 가는 성산교회 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이인재 조사님은 때때로 혼자서도 기도하시려고 삼각산에 기도하러 가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삼각산 기도회에 다녀오시면 나의 아버지 어머니, 또는 언니 오빠들을 통하여 삼각산 기도회 내용을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다.

삼각산 기도회에 가면 아침은 온교인도 으례히 금식기도회이고 낮예배를 드리고 점심시간인데도 이인재 조사님은 좀처럼 식사하러 오시지 않아서 여기 저기 살펴보면 아직 벼랑 끝에 꿇어 없드려 기도하시는 중이라 누구도 식사하시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점심 이후에는 참석자 전교인이 자유로 약 두 시간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인재 조사님께서 서로 간격을 두고 멀리 떨어져서 기도하세요하시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앉아 기도하게 되면 웅성웅성 잡담도 할 수 있으니 멀리 떨어져 앉으세요하셨다고 한다. 교인들은 편안한자리를 서로 골라 가면서 편이 앉으려고 하는데 이인재 조사님께서는 벼랑 끝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시기 때문에 아차 실수하면 낭떨어지로 떨어져 다시는 올라 올 수도 없는 자리를 골라 앉으시기 때문에 교인들이 조사님 벼랑 끝에서 떨어질 것 같아서 너무 걱정이 되어, 기도 도중 조사님께서 무사하신가를 살피고 또살폈다고 한다.

어느 날, 남자 제직 한 분이 목사님, 몸을 돌보며 기도하시면 좋겠어요했더니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라가 두 동강이 났는데, 내 건강을 생각하며 집에서 편한 잠을 잘수없어요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깨여 기도합시다. ”

말을 건넨 제직은 이후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11) 성산교회 크리스마스 1949

 

성산교회는 내가 어린나이에도 젊은 남자교인이 아주 많이 있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홀로 내려온 교인이 여러 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성탄절, 약 한 달동안 성가대들이 찬양 준비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탄 이브 시간이 돌아왔다. 성가대 대원은 약 25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탄 찬양대로 교인의 집들을 가가호호 방문을 할 예정으로 간단한 야식 후 밤 12시에 출발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때 내 나이 11, 나와 동갑내기 평양에서 반부락사이에 태어나 부모와 떨어져 38선을 넘어 우리 집에 잠시 머물었던 시간이 있었던 친구로 조만식 장로님 외손녀인데 나와 동갑내기이다.

나와 친구는 11살 나이로 한밤 중에 어른 찬양대를 따라서 밤길을 떠났다. 지금 기억으로 약 2시간 정도는 잘 걸으면서 열심히 찬송가도 부르면서 따라다녔다………..

기쁘다구주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열심히 불렀고, 또 걷기도 잘했다. 그런데 지금 기억으로 겉옷을 무엇을 입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북에서 왔으니 코트는 든든하게 입었기에 어른들이 우리를 데리고 밤찬양을 허락을 했던 것같다. 그런데 서울12월 날씨가 어린 우리들에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한밤 중, 새벽 2~3시경에 내가 너무 추워서 친구에게먼저 너 춥지않니?”하고 물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친구 대답이 너무 추워하면서 울먹였다. “우리 그냥 교회로 돌아갈래?” 내가 물었다. 첫마디 대답이 ~ 갔으면 좋겠어”. 그냥 교회로 돌아 가자고 하였다. 우리 둘은 어른 성가대 뒤로 살살 걷고 있었던터라 쉽게 성가대 일행에서 빠져 나와 달 밝은 밤길 강아지도 한 마리 없는 길을 약 40분간 친구와 나는 걸어서 교회 현관까지 잘 찾아갔다. 교회 안에 들어서니 마침 이인재 조사님 사모님께서 너희들 왜 잠도 안자고 돌아다니냐?” 하시기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사모님, 너무 추워요하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사모님께서 나를 따라 와하셨다. 사모님 뒤로 따라서 방으로 들어갔다 친구와 나, 둘이는 이부자리가 깔려있는 이불 밑에 발을 넣고 그만 잠이 들어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 보니 이인재 조사님은 철야기도하시다가 방에 내려오셔서 아침 밥을 잡수시고 올라가신 것 같았다. 우리는 밥상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잡수시던 밥이 반그릇쯤 남아 있었는데 사모님이 나와 친구에게 반씩 먹으라면서 밥그릇 뚜껑에 반을 덜어 친구에게 주고, 밥그릇에 남은 밥을 내 앞에 놓아 주신다. 밥은 보리가 3분의 2 쯤되고 쌀이 조금 석여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보리가 들어간 밥을 먹어보았다.

반찬이 갈치와 깍두기, 두가지였다. 어린시절 나의 손가락 두 개를 합친 넓이의 갈치인데 조금 뜯어 입에 넣어보니 바들 바들 떨릴 정도의 짠맛이고 깍뚜기 역시 너무 짠맛이었다.

아침밥을 목사님댁에서 먹고 교회로 올라가니 교회는 난리가 났다.

나와 친구는 밤찬양길에 어른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한밤 중에 교회로 돌아온 것인데... 어디로 사라져 버린 우리 둘을 찾으면서 가가호호 방문 찬양하던 성가대 대원들이 어린 꼬마 두 명, 어디로 갔지?” 놀라서 어른 2명이 밤길에 우리를 찾았으나 찾지 못해 교회로 와 보았는데, 역시찾지 못햇던 것이다.

아침까지 교회에 나타나지 않자 교인 전부가 어린 아이 2명이 없어졌다고 우리를 찾느라고 온교회가 야단법석이었던 것이다. 온 교회 교인들이 우리를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한 밤중에 찬양대원 2명이 교회로 돌아와 찾아 보았는데도...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곤히 자고 아침 먹고서 발견되어 교인들을 크게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방은 조사님과 사모님이 쓰시는 안방이었는데... 그날 마치 조사님은 철야기도 중이라 사모님만 계셨던 것이다. 그날 그밥이 우리가 먹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모르고 지났지만 내가 자라나 철이 들면서 사모님은 그날 밥이 적어서 굶어셨던 것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때때로 사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내가 철이든 나이에 사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옜날 성탄 밤에 있었던 이야기도 할 수 있었을터인데 ………

한바탕 웃어보기도 하고 사모님께 성탄 새벽에 있었던 일을 고마왔다고 맛나는 음식도 대접을 해 보았을터인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인생길이 그렇다고 나를 깨우쳐 준다.

아직 분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반찬이 갈치, 깍뚜기 두가지였다. 어린시절 나의 손가락 두개를 합친 넓이의 갈치인데 조금 뜯어 입에 넣어보니 바들바들 떨릴 정도의 맛이었고, 깍뚜기 역시 너무 짠맛으로 아직 기억을 한다..

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갈치와 깍뚜기를 볼 때마다 이인재 목사님의 밥상을 잊은 적이 별로 없다.

그렇게 험한 음식을 잡수시면서도 교인들 힘든 가정을 사랑으로 몸소행하시던 이인재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진실한 주님의 종이 몇분이나 되실까?’ 내 나름대로 상상도해 본다. 깊은산 벼랑 끝은 아니더라도 골방에서, 교회 강대상 밑에서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깨어기도하시는 주님의 종이 좀 더 많은 숫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나는 1949년 크리스마스 이후 내 나이 열 살 때부터 집에서 밥을 먹을 때 지금까지 반찬이 조금 좋지 않을때면 이인재 목사님의 밥상을 떠올리면서 짠맛의 갈치와 깍뚜기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먹고 있다.

(12) 6,25 동란 때

 

이인재 조사님 가족이 한강다리를 넘지 못하셨다. 장충동에 계셨다고 한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하니 서울 시내는 말이 아니었다. 그 난리에 자기 가족도 힘이 드는데 이인제 조사님은 조만식장로님 외손자 수열 오빠를 한명을 간수하며 6.25를 힘들게 지나셨다. 6,25후에는 우리는 이인재 조사님은 만날 수 없었다. 온 국민이 피란살이를 할 때였다.

 

(13) 부산 제주도 피란살이

 

우리 가족은 1,4후퇴 후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우리 일행은 큰 오빠 친구의 가족도 함께 다녔기 때문에 일행이 약 30명쯤 됐다. 한상동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초량교회를 찾아갔으나 먼저 피란 온 사람들이 교회뜰에 가득해서 더는 들어오지 못한다고 우리를 가로 막아서 교회 뜰에 들어설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교회 문 옆에 우리 일행이 서성거리고 있을 때 한상동 목사님께서 심방가셨다가 돌아오시는 길에 우리를 보시고 들어가자하니 교회 문을 막고 못들어가게 하던 사람들이 아무 말 못하고 우리는 목사님을 따라가 목사님댁 응접실에 큰 오빠 친구 가족은 목사님 사택 뜰에 우리 가족은 또 안방까지 내주셔서 약 한달간 묵고 있다가 정부에서 제주도로 이동할 수 있게 해 줄 때 미국 상선 (미국에서 군인 음식을 조달하던 배였다고 한다) 제주도로 갔다.

제주에 도착하고 약 석달쯤 되었을 때 이인재 조사님이 이제 목사님으로 되어서 우리 피란살이가 염려되어서 한상동 목사님과 함께 찾아오셨다. 옜날 성산교회 교인들, 그리고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을 몇 집을 위해 선교사들에게서 구호 물자 얻어다 주시면서 가정마다 쌀을 한가마씩 사주고 가셨다.

 

(14) 미국 필라델피아에 이인재 목사님

 

나는 이인재 목사님을 제주 피란시절 교인 몇집을 돌보아 주려고 오셨던 기억이 있다. 잠시 얼굴만 뵌적이 있다. 그 후에 미국 뉴욕으로 나는 이민을 와서 살면서 나의 친정 아버님으로부터 이인재 목사님이 미국 필라델피아(교회이름 모름) 어느 교회 목사님으로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느날 뉴욕 한국기독교 방송 라디어에서 오늘 저녁 동부에 계시는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다는 말을 방송으로 흘러 나왔다. 그 교회에 전화를 하면서 필라델피아 이인재 목사님도 오셨느냐?”고 나는 물었다. 전화를 받은 교회 여직원이 , 이인재 목사님오셨어요하였다. 저녁 시간에 몇시에 페회가 된다는 말까지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 시간 조금 전에 가서 이인재 목사님을 찾았다. 멀리서 한분이 나에게로 다가 오는데 알 수 없는 분이다. 내 나이 12살에 잠시 뵌적이 있고는 약 55년 후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간 뒤였다

누가 나를 찾는다해서 나왔는데 ...

자세히 보니 눈가가 옛날 이인재 목사님같아서 물었다 저는 이인재 목사님을 만나러왔어요했더니 내가 이인재목사요하셨다.

나는 그때 나의 친정 아바님의 이름을 대면서 셋째딸이에요했더니 너 도윤이구나하셨다.

나는 깜짝 놀랏다 약 55년전에 제주도에서 만났던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6,25후 제주에서 나의 가족 틈에 끼어서 잠시 얼굴을 뵈었는데 목사님, 제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시냐?” 물었더니 우리 형제 이름을 모두다 기억한다 하시면서 8남매 이름을 차례로 외우고 계셨다.

그 시간 식사를 교회에서 하고 계시다가 나오셨다고 하시길래 목사님, 제가 식사를 대접하려고 왔는데요?”했더니 잠시 후 필라델피아로 가신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는 낮시간에도 2시간 반쯤 걸리는데 밤길 한참 가셔야되겠네요했더니 막내 아들이 운전을 하는데 젊어서 운전 괜찮을 거야하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00 을 핸드빽에서 꺼내여 목사님 손에 건네 드렸더니 바지 뒷주머니에 돈을 넣으시고는 단추를 잠구셨다. “목사님, 내일 점심에 맛 있는 것 사 잡수세요했더니 나 맥도날드에 가서 빅맥사먹을거야하셨다.

이인재 목사님은 빅맥, 나 참좋아 한다하시며 미국 음식은 부드러워서 좋아그러셨다.

옛날 목사님 밥상이 떠올랐다. 깍뚜기와 아주 짠맛의 갈치...

그 다음날, 내 친정 아버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 어제 이인재 목사님 용던드렸더냐?”하셨다.

~ 조금 드렸어요

나한데 전화로 장로님 셋째 딸이 용돈 주더라고 좋아 하시더라

 

(15) 이인재 목사님 감옥에서 읽으셨던 성경책

 

그 후 나는 딸이 필라델피아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Mba 과정을 하고 있을때라 약 한달에 한번씩 딸의 음식을 가지고 갈 때마다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 뵈면서 용돈도 가끔 드렸다. 때때로 뉴욕에서도 만나 뵐 수가 있었다.

얼마 후 딸이 졸업하면 자주 뵙기가 힘들 것 같아서 한번은 사모님, 저에게 목사님 넥타이 낡은 것도 좋으니 한 개 주세요.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요했더니 목사님, 도윤 집사가 목사님 옷이나 넥타이를 기념으로 간직하가고 싶답니다전하셨다. 이 목사님은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셔서 큰소리로 말해야 들을 수 있다면서 싸움하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연세도 있지만 몸을 자유로 음직이기가 힘들어 하셨다. 저는 목사님, 조심하셔야 되겠네요.” 그때 목사님 대답이 나 넘어지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내 팔을 잡아주셔서 괜챦아. 걸을 때는 예수님하고 손잡고 다니거든말씀하셨다.

사모님 말씀이 추운 계절 밖서 꿇러 앉아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시다가 서리를 맞은 후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고 하셨다.

서재로 들어가시더니 크고 낡은 성경책 한 권을 들고 나오시면서 나를 기념하고 싶다는 사람 네가 처음이다. 이 성경 내가 감옥에서 읽던 성경인데 가지고 가서 기념으로 간수하여라하시는 것이다.

나는 성경책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온 후도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자세히 쳐다보며 오랜 세월 눈물 콧물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자국이 눈에 보인다.

으래히 성경책이라면 겉 표면의 종이 색갈이 붉은색이어야 하는데 손때로 검정색으로 변한 모습. 가죽 뚜껑은 얼마나 들었다 놓았다 하시면서 눈물이 콧물이 묻어셨는지 회색빛으로 변한 부분. 자세히 쳐다보며 이 성경책 말씀 속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우리들의 구원을 약속해주신 말씀이기에 가슴에 새기며 주님과 대화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사진을 발로 밟으며 예수님을 부인하면 감옥을 면할수 있었다고 한다. 주기철 목사님, 이인재 목사님, 한상동 목사님 외 몇몇의 목사님만 목숨을 걸고 옥고를 치러셨다. 주기철 목사님을 끝내 감옥에서 순교하셨다

이인재 목사님께서 내게 주신 성경책은 평양 감옥에서부터 8,1,5 6.25 거제, 대구, 미국 필라델피아까지 여러 곳을 가지고 귀하게 간수하시며 다니신 곳도 여러 도시 지방으로 이사를 한 곳을 나는 모두 알 수 없으나 내가 성경을 받을때는 약 60년 간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시며 귀하게 간수했던 성경책을 왜? 내게주셨을까?

한 편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했다. 이 성경책을 잘 간수해서 나도 여러곳을 이사할 때마다 우선 이인재 목사님의 성경을 제일 먼져 챙겼다.

그 후 뉴욕에서 노회가 있을 때는 뉴욕 우리 집에 오셔서 계셨고, 그 때 내가 다니고 있던 교회는 뉴욕 Bayside 에 있는 신광교회였는데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설교를 은혜롭게 하셨기 때문에 교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우리 집에 계실 때는 모든 시설이 잘되어 있는 방으로 안방을 드렸더니 내가 올때마다 나를 이렇게 좋은방에서 쉬라고 하시면서 기뻐하시며 그래 내가 묶으면서 지나간 집은 모두들 잘되더라시며 웃으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잊지 않고 해주셨던 이인재 목사님의 모습을 지금도 나는 내 기억 속에서 간직하고 있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계실때는 구역예배를 우리 집에서 드렸다. 보통 12-15명 정도 참석하는 구역인데 이인재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할 때는 약 40-50 정도가 구역예배에 참석을 해도 나는 구역원들에게 저녁식사를 정성껏 기쁜 마음으로 대접했다(미국은 일터에서 직접 구역예배에 참석하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꼭 대접해야 한다).

얼마 후 나의 친정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1주기 추도예배도 이인재 목사님께서 집례를 해주시고 약 3년 후에 이인재 목사님도 천국으로 가셨다.

제가 기념으로 받은 이인재 목사님께서 감옥에서 읽으시던 성경책이다. 20년 동안 제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이인재 목사 기념관이 경남 밀양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해서 제가 Computer 웹싸이트에 들어가서 경남 밀양에 있는 무지개전원교회를 찾아 담임목사 박시영 목사님과 의논 끝에 이인재목사님께서 옥중에서 읽으시던 귀한 성경책을 기념관으로 돌려 보내며 서운한 마음보다 기쁜 마음이 앞선다.

내가 보관할 때는 한개의 보물이었지만 기념관에 보관하면 몇갑절의 보물이 될것이라 생각하며 우리들 후손들의 신앙생활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면서 영원히 잘 보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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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재 목사을 추억하며 김도윤글
  • 2015-04-27
  •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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