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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지역 첫 전도자-베어드

  • jfirst2
  • 조회 : 1845
  • 2007.09.14 오후 04:55


  경상도 전도 여행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연민을 알지 못한다. 울어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가 없다. 어둠 속을 헤매보지 않고는 방황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길이 없다. 때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바는 무엇일까. 착하게 양심적으로 살았으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왜 하필 나냐?\""고 울부짖어 보지만 높은 곳에서는 대답이 없다. 하나님의 속내는 무엇일까. 평상시에는 잘 알 수가 없고, 고통에 빠져 있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율처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때가 있다. 그냥 스쳐 지나가면 보이지 않지만 낮은 마음으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살아있는 그분의 숨결. 그래서 물질만능시대에 겸손하게 기도하며 복음이 전파된 경상도 옛길을 따라 ‘성지 순례’를 떠나는 크리스천들이 매년 늘어나는지도 모른다.  

   배위량 선교사의 경상도 전도 여행

   경상도 복음길은 대구·경북에서 첫 전도여행을 떠났던  미국 북장로회 베어드(William M. Baird·배위량) 선교사가 간 길을 따라 가는 육로 여행길이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0년 여름, 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대한제국으로 가서 선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왜 하필 접니까?\""라고 묻지 않고 순종했다. 그만큼 조선으로의 복음 전파는 시급했다. 그해 11월 18일 결혼한 베어드 선교사는 당일 오후 한국을 향해 ‘동방 여로’에 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요코하마 고베 나가사키 쓰시마를 거쳐 두 달 열흘 만에 부산에 도착(1891년 1월 29일)했다. 이미 국내에는 알렌 목사가 갑신정변 때 심하게 다친 민영익을 치료해준 공로로 황실 어의가 되어 있었다. 천주교가 전래되던 살벌한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부산 선교부를 구역으로 배정받은 베어드는 입국 2년 만에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 북부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경북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말씀을 순수히 전할 수 있을까?”

   미션을 부여받은 베어드는 물길이 아닌 땅길로 부산을 출발, 동래→범어사 계곡→ 양산→물금→밀양 유천을 거쳐 경북 청도에 1893년 4월 21일 오후에 도착했다. 난관에 부딪혔지만 되돌아갈 수 없었다. 오직 한 길, 주님을 향한 외길뿐이었다.  


   백년후애 천년지애를 보장하는 복음의 현장

   베어드 선교사는 청도로 들어오기 하루 전날, ‘한국의 나일’로 불리는 낙동강을 품에 안고 아름다운 영남루를 보듬은 경남 밀양 유천 강마실에 들렀다. 지금은 경부선 철로가 새 길을 따라 약간 방향을 틀었지만, 당시는 기차가 서던 구(舊) 유천역 바로 앞의 아담한 일본식 집에 짐을 풀었다. 내일이면 유학의 본향에 첫발을 내디딜 것이다. 베어드는 황해도 소래 출신 서경조, 심부름꾼 등을 데리고  도보 여행 끝에 밀양에 당도한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가 묵었던 이 여관은 113년의 풍상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그 옛날 첫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 베어드 선교사 일행을 맞았던 게 마치 어제 일인 양, 시간을 건너 뛰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하늘의 사랑이 계속될 것을 약속하는 ‘백년후애 천년지애(百年後愛 千年祉愛)’의 현장이다. 선교사 일행이 묵었던 그 여관은 신기하게도 선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밀양 옥산교회 갈보리 선교회)가 되어 있다. 마치 사도들의 발길이 닿았던 세계 각처는 로만가톨릭이든, 동방정교회든 어김없이 교회가 들어선 것처럼. 기자 일행이 찾아갔을 때는 평일 낮시간이어선지, 선교회 문이 바깥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2층에 묵었던 베어드 선교사가 걸어올라갔을 내부 계단이 어디 있음직한데, 유리문으로 들여다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100여 년 전, 당시 고단한 행장을 꾸려 청도로 떠나려는 베어드 일행에게 강마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베어드 일기에는 “책을 사겠다고 난리를 쳐서 저녁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베이드 선교사가 판 책들은 일반 서적이 아니라 복음서 가운데 하나만 담은 ‘쪽 복음서’이었으리라.  


   선교사도, 짐꾼들도 쉬어가던 납딱바위  

   “책 속의 진리를 전할 시간을 채 갖지 못했다.”고 베어드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이번 경상도 전도여행은 본격적인 전도를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곧 다가올 미래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탐색 여행의 성격이 진하다. 일행은 일정보다 다소 늦게 밀양을 떠나 21일 오후 청도 삼거리에 도착했다. 밀양에서 청도까지 쉬지 않고 걸어온 베어드 일행은 청도 읍내의 널찍한 바위에서 잠시 쉬어간다. 바위 옆,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는 맑은 물이 감도는 깊은 소(沼)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수백 년은 됨직한 노거수와 샘까지 있어 주님의 종들이 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베어드 선교사가 택한 복음 여행길은 과거 선비들이 부산에서 밀양 청도 대구 문경새재 충청도를 거쳐 한양(서울)으로 다니던 '과거길'이자 조정에 공물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베어드 일행이 머문 청도의 명물 납딱바위는 한때 경부선 철로를 내느라 대부분 땅에 파묻혀버려 일부만 남아있었다. 지난 98년 김상순 청도군수가 청도 역전 도로를 확장하면서 납딱바위의 건강한 몸체를 더 드러내고 주위에 향토수종을 심어 옛맛을 일부 살려냈다. 하지만 과거를 앞두고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의 답답한 가슴을 식혀주고,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한줄기 생명수를 주던 납딱바위 옆 찬물샘은 묻혀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차들이 쌩쌩 달려가는 대로변을 약간 벗어난 청도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는 납딱바위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예정된 미래’를  준비했던 선교사들의 복음 여행의 현장이었음을 온몸으로 말하여 주리라.  


   도보 강행 끝 대구 남문에 도착

   팔조령(八助嶺) 도적떼를 피해, 숲길에 우거진 가시덤불에 가슴을 찔리는 강행군 일주일 만에 베어드 일행은 대구 남문에 도착했다. 1893년 4월 22일 오후 1시, 대구에 개신교가 전래된 ‘영원의 시간’이다. 이후에도 베어드는 경상도 전도여행을 몇 차례 계속했다. 첫 방문 이듬해인 1984년 4월과 5월에 대구를 2차, 3차 방문한 베어드는 대구에 선교지회 설치를 청원하여 1895년 11월에 승인을 받아냈다. 남문 안 정완식의 땅(420평)과 집들을 구입하고, 아내 애니와 아들(존)을 데리고 이사를 왔으나 서울로 발령이 나고, 1986년 11월 손아래 처남인 애담스(Rev. James E. Adams·안의와) 목사에게 인계됐다. 일 년 뒤인 1897년 대구에 부임한 안의와 선교사는 1923년 대구를 떠날 때까지 실로 큰 업적을 남겼다. 대구 제일교회를 설립한 데 이어 반야월교회 사월교회 등을 세웠나하면, 대구 첫 남자초등학교인 대남소학교(희도학교 전신·1900년)와 계성학교(1906년) 등을 세웠으며 계명대학교 창설자이다. 1897년 11월 1일 대구에 도착, 지체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 애담스 목사는 대구를 서울 평양에 이은 3대 선교 거점으로 육성시킨 주역이다.  


   (글 최미화 편집위원 / 사진 정우용 기자 / 도움 박정규 대구교회사연구소장, 대구제일교회, 대구반야월교회)
   출처: http://blog.naver.com/kjyoun24 네이버 블로그 정연이네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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