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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

  • jfirs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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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14 오후 05:06


The General Assembly of Korea Presbyterian church

(1)  1907년 9월17일 장로교 최초의 조직인 독노회(One Presbytery)조직,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카나다장로회의 4개국 선교사들은 선교 파송국은 각각 다르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One Presbytery)라는 의미에서 독노회 명칭을 사용하면서 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노회의 결의에 의하여 평양신학교 졸업생 7명에게 목사안수를 하였다. 이 조직은 하나님의 주권적 말씀안에서 기독교 일치와 미래지향적발전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  1912년 9월1일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노회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승격 결성하였다.

(3)  1935년 1월 신사참배 문제가 한국교회에 불어오기 시작하자 이것은 십계명 1.2.3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이므로 모든 교회가 반대 할 것을 각오하였다. 그러나 탄압이 강화되므로 장로교단 외에는 신사 참배에 모두 굴복하고 말았다.

(4)  1938년 9월 9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27차 장로회총회가 개최되고 본 총회 에서 일제의 강압이었지만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일 뿐 우상숭배는 아니라는 명분하에 가 결되었다. 그러나 본 총회가 결의한 신사참배 가결은 신앙적으로 큰 죄임과 동시에 불법임을 선언하고 산정현교회를 중심하여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한상동목사 방계성장로와 이에 동조하는 전국의 교회, 목사, 장로 및 성도들이 어떠한 박해가 오더라도 순교하겠다는 정신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길을 택하였다.

(5)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는 평양남문밖교회에서 임시 노회를 열고 일제 는 강압으로 친일 목사들을 협박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것과 총회장 경고문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주기철목사의 목사직을 파면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 결의된 사실이 당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게재되어 오늘까지 보관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 진리적 행위를 자행하는 결과였기에 수진(眞理를 사수하려는)자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1996년1월현재까지 한국장로교회는 주기철목사를 목사직의 파면 철회와 함께 복권을 하지않고 있었다.

(6)  1943년 조선기독교의 모든 총회는 해산되고 일본기독교 조선기독교단으로 변체되어 해방 될 때 까지 일본기독교에 예속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기독교는 없어진 것과 같이 되었다.

(7)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은 1938년 27차 장로회총회의 모든 결의 사항을 부인하면서 한국기독교를 대표하여 신앙의 정절과 역사의 맥을 가슴에 품고 지하와 삶의 현장에서 투쟁하며 생활하는 많은 성도들이 전국에 있었다. 일본경찰은 이들중 가장 강력하게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신앙인들은 평안남도 평양경찰국이 다루면서 25명을 평양 지방법원에 기소하였다. 이들은 겸손하게 자신들 스스로를 순교자라고 하지 않고 수진자(守眞者)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면서 모든 핍박을 감옥과 여러곳에서 견디면서 살아왔다. 이들에 의하여 1938년에서 1945년까지 끊어졌던 朝鮮基督敎의 역사적 신앙의 맥을 이어주는 그루터기가 되었다.

(8)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후 17일에는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하다가 평 양감옥에 투옥되었던 25명중 주기철목사를 중심한 9명은 순교하고 이기선 채정민 한상동목사를 중심한 16명은 산 순교자로 출옥하였다. 그들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다가 閉鎖 (폐쇄)되었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 모여 그곳에서 2개월간 숙식을 같이 하며 한국기독교 의 혁신복구방법을 검토하면서 기도하였다. 이곳에서 부터 극우 신앙인이라 불리우는 재건파와 회개를 촉구하면서 화합을 바라는 혁신복구파, 그리고 신사참배에 동참했으면서도 회개를 거부했던 극좌로 나뉘어지는 삼파의 실체가 뚜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 신학 사상은 접어 두고라도 실재적이고 행동적인면에서 한국장로교는 여
기서 부터 분열되기 시작했음을 관심을 가지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의 원칙을 말씀 안에서 주장하던 수진자들은 평양산정현교회에서 견디지 못하고 1947년에는 평양목장 으로 나와 임시예배를 드리다가 송현여학교를 매입하여 정식교회로 정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한국장로교 교단복구에 정성을 쏟았다. 이유는 일부 산정현교우들이 신앙적으로 이북5도 총회와 또 신사참배자들과 회개없이 신앙의 기준없는 타협으로 성도라는 미명하에 행포가 자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순교의 요람지인 산정현교회에서 나온 수진자들은 하나님앞에서 범죄의 상처로 얼룩진 한국기독교에 치유(治癒)를 위한 실천적 운동으로 이미 선언된 혁신복구운동(革新復舊運動)의 방안을 펼치는데 정성을 쏟았다.(이때를 기점으로하여 산정현교회 당회장이었던 한상동목사는 월남하였다가 평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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