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전원교회

자유 게시판

자유롭게 유익한 소식들 올려주세요

밀양지구SFC 인맬을 더듬어

  • 김종화장로
  • 조회 : 4701
  • 2011.05.11 오후 10:14



밀양지구SFC 인맥을 더듬어

김만우 revmanwookim@hanmail.net 필라델피아제일장로교회
박재영 cyoungpark@hotmail.com 뉴저지제일한인교회
* 밀양 동문안성결교회 출신인 배상호 동문 (3시반 이후)

-------------------------------------------------------------

밀양지구 초대위원은 경남지방 초대위원처럼 문헌적 자료가 없다(아직 찾지 못했다). 이는 <선운동 후조직>이란 SFC의 특성상 어쩔 수 없어 보인다. 배우고(학생) 확신하는(신앙) '운동'이었기에 초기 SFC맨들은 직책 같은 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특히 밀양은 대학이 없어 대부분 고교SFC 운동이었고, 대학에 진학한 이들은 그 지역 위원으로 발탁됐다. 밀양지구는 밀양시역을 경계로 하고 있으나, 경남중부노회가 되기 전에는 창원과 김해 일부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중앙(전국)SFC 조직 이전엔 '밀양지방'으로 불리다 조직 후에 '마산지방'으로 편입되고, 한동안 '금(김)창지구'로 불리다가 진영과 덕산 본포 등을 제외한 현재의 밀양시찰 산하 '밀양지구'가 되었다. 지금은 동·서지구로 분립돼 있다.

학생신앙운동의 모체가 된 고려신학교 주최 기독학생수양회와 초기 SFC수양회에 참가한 초창기 밀양 출신은 다음과 같다.
▲ 2회(1949.1 고려신학교)- 김용오(가인교회) 이진수(삼랑진 미전,동래중) 백성동(〃,부산상업/장로) 박상영(예림,대구농대/교사) 박수명(〃,밀양중) 이원재(〃,밀양농잠/공무원,장로) 김재수(〃,밀양농잠) 우종건(〃,밀양중/교사) 이관호(밀양읍,계성중) 김세윤(〃,계성중) 하정수(〃,부산중) 김소식(〃,밀양농잠) 김상곤(〃) 정성영(〃) 박재영(〃) 한태근(동문성결) 곽무학(〃,밀양중) 오성운(〃,밀양농잠) 양주석(〃) 조광제(진영,마산상업) 조희제(진영,경남중) 박을용(진영,한얼중) 어상선(진영,한얼중) 김윤찬(신룡,한얼중) 이점상(일동,대산중) 임창섭(〃) 김종도(〃,창신중)
▲ 3회(1949 여름/고려신학교)- 박재영 김영호 강석준(밀양읍) 이은제 이영제[본명 이영수] 신현덕(마산교회) 박상길 김재수 우종건(예림) 김애도 김윤도 김성도 김한도 어상선 송성만(진영)
▲ 4회(1950.1 고려신학교)- 김복동 백일성(덕곡) 이수도(가술) 김애도 송성만(진영)
▲ 6회(1952.7 남교회/SFC 창립대회)- 서인진(가술) 홍만도(삼거)
▲ 7회(1953.1 남교회)- 김신 조용규 박병은(수산) 배경선 김경희 조영희 박주선 문복선 김종도 정원철 박광호 공성문(일동/재일) 박재명(외산)
▲ 8회(1954.1 남교회)- 배수호 김양삼 정태홍 조용규 김종구 박병은(수산) 홍지화 공성일 김종도 정원철 손상도 정차근 공성문 김종군 조영희 박은희 박광호 문진선 배경선 송혜영(일동) 이창우 이형태 김영석 심군식 이종출 김만우 이언우 이점호(진영)
▲ 9회(1954.8 남교회)- 이은우 김민우 조진환 감기철 이명우 이창우 이종출 이점호 최귀임 박영일 이경희 김선태 권오관(진영) 김치호(예림) 박의문 박종태(마산) 이충웅(상동 옥산) 송세근 김동진(담안) 박성실 이춘희 박수용 장남순 한현수 김영자(예림) 배경미(일동)
▲ 10회(1955,1 남교회)- 김종군 정차근 손상도 임창섭 문진선 공성일 정원철 배경선 조영희 심경섭(일동) 허칠성 김보석(가술) 이은우 안승록 김만우 김은태(진영)
▲ 11회(1955,7 남교회)- 허칠성(가술) 김성희 이경희 김만우 김영석 공성문(진영)
▲ 12회(56.8 송도 고려신학교)- 김정자(삼거) 김흥도(사산) 이춘희(예림) 배경미 손상도(일동) 이경희(진영) 한정성(삼문) 이상환(가술)
▲ 13회(1956.12 서울충현교회)- 없음
▲ 14회(1957.12 부산남교회)- 강창호(삼문) 최남성(가술) 김치호 김수일 김호일(예림) 이경희(진영읍) 김영환(사산/경남지방 초대위원장)
▲ 15회(1958.7 부산남교회)- 없음
▲ 16회(1959.1 대구 성남교회)- 박규홍(상동 옥산)
이들 중에는 학생이 아닌 청소년도 많았고, SFC의 전신인 YFC의 주요 멤버로 SFC창립에 공헌한 오병세 전도사가 시무한 일동교회 출신이 많다. 지금도 배경재 동문의 여동생 배경선 권사는 당시 수양회 취사부로 수고한 정혜경 권사(마산 삼일교회) 등 일동교회 출신 동문들이 모임을 갖고 있으며 김치 얻으러 다닌 일을 지금껏 추억하고 있다. 정혜경 동문이 금창지구 SFC 연합예배에서 찬양하는 모습이 좋아 며느리 삼겠다고 3년간을 기도한 시모님 덕에 진례 담안교회로 시집을 갔다. 정혜경 동문의 동생 정차근 장로는 주일학생 시절, 9km 들길을 걸어 진영역에서 기차를 타고 참석한 전국수양회 성경암송대회에서 수상한 기억을 떠올리며 "SFC는 한국 교회의 큰 축복이고, 우리 교단을 지탱하게 한 원동력"이라 간증한다. 당시 용두산공원 아래 있던 부산 본역에 내리면 수양회장인 남교회에서 밥짓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났다고 추억한다. 눈을 감으면 '밥 타고 국 타던 냄새가 지금도 난다'고 한다. 칠순을 넘기면서도 부산장로성가단원으로 활약하는 정차근 동문은 잊지 못할 기억을 하나 갖고 있다. 당시 교우들 집 인방에는 붉은 십가가가 붙어 있었다. 논에서 김을 매던 남로당원 하나가 흙덩이를 경찰 얼굴로 집어 던지는 것을 신호로 반란 사건이 터졌다. 진압 병력이 와서 집집을 수사할 때 십가가가 붙은 집은 그냥 지나갔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모두 끌려 갔다. 다급해진 사람들 중에는 정 동문 집으로 성경책을 빌리러 오기도 했다. 유월절 같은 풍경이었다. 배경선 동문은 오빠 배경재 동문 소천 후 오빠가 보고싶어 오빠 친구인 조긍천 목사와 박재영 목사를 만나면 두 번 세 번 쳐다본다고 한다. 배경재 동문 자녀로 배진원 목사(합동)가 있다. 초창기 일동교회 오병세 전도사는 메시야 할렐루야를 지휘할 정도로 열정에 넘쳤으며 철저한 신앙교육을 펼쳐 때로는 나무라고 격려하였다고 입을 모은다.
9회 때 참석한 밀양마산교회 박의문 동문은 불신 가정에서 교회 출석에 애로가 많았다. 성경과 옷을 빼앗기고, 똥물을 뒤집어쓰기까지 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하여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성탄 찬양 때도 부친이 물을 덮어씌웠다. 우리는 모두 열심이었다. 농사짓다가도 부산의 사경회나 세미나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와 타작을 하고, 친구들이 술 안 먹는다고 옷에다 부어 옷을 다 버리기도 했다.[2011.2.16 대흥교회 박태문 은퇴장로 증언]

문헌상 밀양 사람으로 경남지방 위원이 된 분은 1961년 여름 제4대 경남지방 문화분과위원 강종태(삼문교회/대구성산교회 장로은퇴) 동문이 최초이다. 다음은 5대 경남지방 총무 최연웅(진영읍교회) 동문. 그러나 문서 정비 전 경남지방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김영환 동문이 밀양지구의 전신인 금창지구 출신이다. 그리고 2~5대 전국위원장을 역임하며 SFC의 기초를 닦은 배경재 동문, 배동문을 이어 6~7대 전국위원장을 지낸 박재영 동문 역시 밀양지구 출신이다. 가술교회 출신의 오세창 교수 오성률 변호사 형제도 빼놓을 수 없는 밀양학신의 인물이다. 오성률 변호사는 학생시절 SFC 수양회에 참석하여 법조인의 간증을 듣고 율사가 되었다고 간증한다.
밀양지구는 삼문교회와 예림중앙교회가 주축을 이루었고, 평촌의 밀양마산교회, 하남의 수산교회, 무안동부교회, 일동교회, 진영교회 등이 활발했다. 진영교회는 철도가 있어 교통이 좋고 한얼중고등학교를 세운 강성갑 목사를 비롯 김동길 조향록 이규호(전 교육부장관) 제씨가 교사로 있어 아동문학가 심군식 목사와 초대 전국SFC 김만우 목사 등 인물을 많이 배출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 소설가 김원일,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 씨가 주일학생으로 있었다. 밀양의 세종고 밀양종고 농잠학교 진영의 한얼중고, 가술의 대산중고 학생들이 대부분인 초기(1957~61) 주요 인물로는 김창환(삼문/장로) 정용부(삼문/장로) 김정식(삼문) 김정대(삼문) 박성실(예림중앙/장로) 박대은(예림중앙/장로) 김호일(목사/서울) 장필준(삼문/서울) 심덕용(삼문/목사) 제씨인데 당시 삼문교회 담임목사의 자제였던 김만우(삼문/목사) 동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음 세대로는 김만우 동문의 아우 김성우(CBS부장역임/장로), 김진섭(백석대 부총장/목사) 동문과 강신우(무안동부/장로) 김정일(삼문/현 부산삼일/장로) 김정일(수산/장로) 김치호(예림중앙/목사) 김정식(예림중앙/장로) 이춘희(예림중앙/장로) 박영호(예림중앙/장로) 박대용(예림중앙/목사) 이명우(예림중앙/목사) 동문이 뒤를 이었는데, 이들은 토요일마다 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당 청소와 성경통독, 지방과 전국수양회 참석, 순회예배 등을 가지며 학원 전도에 힘썼다.
그 중에도 이춘희 동문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쌀 두 되가 수양회 입회비였는데 이 동문은 무릎 꿇고 철야로 금식기도를 하여 수양회의 불을 당겼다. 이 동문은 구자우 반재일 박준식 박신학 박윤배 이재화 동문의 학생 시절 SFC 교사였는데, 무릎을 꿇고 가르치는 바람에 학생들도 두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배우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이후 예림중앙교회 SFC는 전태 동문이 전도사로 부임하여 또 한 번 부흥의 전기를 맞는다.
이후, 경남지방 위원을 지낸 밀양지구 출신은 다음과 같다. 7대 서기 이장문(금창) 봉사차장 최창규(진영읍), 9대 위원장 오세립(금창), 10대 종교분과위원 최일홍, 섭외분과위원 구의호(금창) 김혜경(금창), 11대 서기 신현호(예림중앙) 종교분과위원 원동연(금창), 12대 기획분과위원장 신상현(외산), 섭외분과위원 배동환(삼문), 13대 제2부위원장 김인주(삼문) 부총무 손인식(일동) 선교분과위원장 강은중(외산) 위원 김호용(삼문) 권해진(진영읍) 강신학(무안동부) 14대 제1부위원장 김덕태(예림중앙), 16대 부총무 김학우(일동), 17대 제1부위원장 송치홍(진영읍) 총무 정도헌(예림중앙), 교단분립 후 20대 제1부위원장 김광석(일동) 제2부위원장 성정애(일동) 부회계 한양숙(일동), 21대 위원장 허은덕(가술) 제1부위원장 구자우(예림중앙) 부총무 남영우(일동), 22대 위원장 김종화(삼랑진중앙) 서기 박시표(진영읍) 선교분과장 반재일(예림중앙) 사무분과장 김종기(가술) 섭외분과장 윤태영(삼문) 자료조사분과장 김향숙(수산) 체육분과장 박춘호(예림중앙), 24대 제2부위원장 김혜옥(외산), 25대 서기 이수기(삼랑진중앙), 27대(교단합동) 위원장 장영돈(삼문) 서기 정진욱(수산), 28대 위원장 성철환(무안동부) 총무 박준규(예림중앙) 부회계 정은옥(삼랑진중앙), 32대 서기 이상문(수산) 회계 김주영(귀명), 33대 제1부위원장 안창주(수산), 34대 제2부위원장 박은희(삼랑진중앙), 35대 위원장 김추현(가술), 제1부위원장 이언기(가술/경남중부지방 창립위원장), 36대 제2부위원장 백현희(무안동부) 등이 밀양지구 출신이다. 이들 대부분은 목사(사모)와 장로(권사)로 교회의 기둥같은 일꾼이 되었다.
1970년 여름 삼문교회당에서 개최된 제15회 경남지방 하기수양회(표제:'밝은 등불 손에 들고')를 계기로 밀양지구의 활동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교회당 창문에 모기장을 쳐주고 삼문교회서 수고를 많이 했다. 반재일 동문은 불신 부모 눈을 피해 담을 넘어 새벽기도에 참석하여 SFC맨들을 감동시켰고, 성경을 불사르고 서까래에 매단 부모를 전도한 창녕의 김현숙 동문과 결혼하여 목회를 하고 있다.
이 외에도 김수읍(삼문/목사,서울 안디옥교회-용인으로 이전, 하늘빛교회로 개칭) 김영기(삼문/미 펜타곤 근무) 김광자(삼문/작곡가) 김문복(무릉/공보부 출신) 김지태(예림중앙/교육사) 김인태(예림중앙/사모) 강영구(수산/목사) 강치구(수산/목사) 김종인(가술/나사렛대 재활복지학교수1호) 이정섭(밀양마산/목사) 이정기(밀양마산/백석대 교무처장) 배종석(밀양마산/고려대 교수) 박시영(밀양 연경/목사) 박종규(예림중앙/목사) 강신우(무안동부SFC창립주역), 강신의(무안동부/CA.목사) 강신학(무안동부/목사) 강신재(무안동부) 강신향(무안동부) 강미화(무안동부) 추광종(무안동부/장로) 김성도(가인) 백은택(덕곡/장로) 박희재(덕곡/목사/시인) 김영수(삼문/선교사) 박대복(삼문/성결 목사) 김호용(삼문) 김상용(삼문/목사) 김재용(삼문/필리핀 선교사) 이상신(삼문/목사) 이은길(삼문) 김특수(예림중앙/장로) 김현준(삼랑진중앙/장로) 정영실(삼랑진중앙/성진지방SFC창립위원장/평택 주님의교회 목사) 송활석(삼랑진중앙/일산 효성교회 목사) 이순동(삼문) 박대성(예림중앙) 장지열(삼문) 손희철(마산) 김정주(삼문) 강은열(외산) 김성일(금천) 손선희(금천) 이미영(수산) 편희영(삼랑진중앙) 김길수(삼문) 진상원(수산/목사) 이은숙(예림중앙) 정판석(무안동부) 박신애(예림중앙) 동문 등이 기억나는 인물이다.
이들 중 박대용(예림중앙/목사) 동문의 일화는 유명하다. 1950~60년대 어려운 시절, 생후 1주 때 경기가 심해 부친(장로)께서 "소생시켜 주시면 목회자로 바치겠습니다" 서원했으나, 목회자 형편이 어려운 걸 본 박동문은 내일동시장 삼문교회 문영희 회계집사 댁 잡화상에 취직, 입대하면서 그동안 모은 돈으로 부친이 양봉을 했다. 69년 7월 제대휴가를 나와 진주 계시던 형님(박대은 장로)께 가느라 탄 시외버스가 수산다리를 건너가던 중 자전거 탄 사람이 치일까봐 운전대를 꺾다 다리 아래 낙동강으로 추락, 15명 즉사 30명 중상의 참사가 일어났다. 사업차 이춘희 동문(장로)과 동승했는데 버스가 납작하게 됐는데도 하나도 다친 데가 없었다. 왱왱거리며 소리나는 버스로 다시 들어가 치아가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된 이춘희 장로를 비롯, 몇 사람을 더 구했다. 구조 후 수산 병원에 가 보니 아무 이상이 없다 하여 지서 앞에 갔더니 '산소를 잘 써서' 그랬다느니, '예수 믿어 하나님이 돌봤다'느니 하였다. 저녁에 다리 밑에서 곡성이 들렸다. 승객을 구한 공로로 창원군수 표창과 포상휴가까지 받고 9월에 제대, 송도 고려신학교에 70년 3월에 입학을 했다. 이춘희 장로가 고맙다고 등록금을 내주었다. 지금도 다리를 지날 때마다 기도를 한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한 감사와 요나와 같은 자신 때문에 15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는 참회를 하고 1988년부터 마산 신포동 1가 10번지 윤락가 목회를 시작, 6-7년간 사역하고, 지금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신기리 507번지에 부지를 구입, 성광교회를 개척하였다. 제자 중에 목회자가 여럿 나왔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목회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60년대 초반 석원태 목사가 예림에 와서 SFC를 (재)조직한 일과 김원수 장로(거제) 이인봉(자성대/장로) 신현호(신무인 장로 자제,고교교사 은퇴/서울) 박만흥(서울/기자) 김호일(서울/목사) 손상태, 수산교회의 김정일, 무안의 강신우, 외산교회 신상현, 삼문교회 박성환(밝나라/목사) 동문이 기억난다고 한다[2010.2.11 전화인터뷰]

삼문교회 SFC 인물로 金守邑동문(용인 하늘빛교회 목사)이 있다. 이상근 박사가 학장으로 있던 영남신학교에 다니던 1970~74년 2월까지 4년간 삼문교회 교육전도사(조사)로 있으면서 성령충만한 사도행전적 교회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SFC사역을 시작하여 목회자 사모 선교사 70여 명, 많은 사회 지도층 인사를 양육했다. 당시 운동원들로 하여금 학교 갈 때 교회서 기도하고, 갔다 오면서 기도하고, 수 금 토 3일은 교회당 청소를 하고, 금요 철야기도 후 토요일에는 교회서 성경공부 전도 심방을 하고, 주일 새벽기도와 낮, 오후에 또 심방 전도를 하게 하고, 저녁에 찬양인도를 하여 50~70명의 SFC 정예부대를 편성, 밀양지구SFC를 조직하고 3년간 밀양군 복음화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2읍 10면 38개 교회를 거점으로 5명씩 조를 짜서 백릿길을 걸으며 전도대회를 가져 1,950명에게 전도하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학교 전도를 시작, 나흘간의 특별기간 중에 10개 학교에서 440명이 결신하였다. 삼문교회당에서 월 1회 130명씩 지구SFC 운동원이 모여 집회를 했다. 특기할 것은 당시 운동원들이 공부를 잘 했다는 것이다. 밀양고 1~5등이 다 SFC 운동원이었고, 그들이 국기배례 반대운동을 일으켰으며, 명문대에 진학하여 교수가 되고 원자력기구(KEDO) 등 국가 주요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부흥의 소문이 나자 다른 교회 성도들이 와서 은혜를 받고 지역이 불로 뜨거워졌다. 김재용 선교사, 김상용 이종찬 박길연 밝나라 이상식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전호윤 목사, 성결교 박대복 목사, 김혜옥(강도순 목사 부인), 김혜경 윤정희 김영옥, 그리고 김은섭 김수석 김영목 김영은 김영기 박사 등 많은 인물이 이때 배출되었다. 김재용 이상문 등 운동원들이 '피아노가 없습니다' 기도하면 피아노가 생길 정도로 <대단한 불의 운동>이었다.[2011.2.17 전화인터뷰]
이 무렵 삼문교회 SFC는 배동환-김호용-박대복(목사) 위원장으로 이어지며, 김종한 목사를 초청하여 철야집회도 하고, 부지런히 학교 집 교회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운동을 했다. 토요일이면 교회당 청소를 하고 탁구를 하거나 초등학교 교정으로 가서 농구나 배구를 하기도 했다. 김호용 위원장은 <황금회장>, 박대복 위원장은 <호박회장>으로 불리며 운동원들과 주위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모친(성성이 성도)이 신사참배반대운동에 가담했던 김재용 동문역시 모교회인 삼문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4년간 밀양지구를 지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지금은 필리핀 중부 파나이섬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로 나가 교회 개척 20개처, 1990년부터 호산나신학교(목사 10명 등 30여 명 교역자 배출) 운영, 노회 조직과 선교센터건립 등 이 시대 진정한 엡시맨으로 강령구현을 위해 불철주야 땀을 쏟고 있다.[2011.2.16 김재용 선교사와의 전화인터뷰]
삼문SFC는 1967년에 밀양성결교회 밀양교회(통합) 학생회와의 연합을 주도하여 '밀성삼체육대회'를 10년 넘게 개최하며 친목을 도모하였다. 농구 배구 핸드볼 여자피구 유도 도대표였던 배동환 동문의 할약이 컸으며, 전명호 김영주 등 많은 운동부 학생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당시는 지구모임 때에 북 치고 트럼펫 불며 가두전도를 하거나, 아랑제전도대회 퀴즈대회 찬송가찾기대회 성경구절찾기대회 배구대회 등을 개최했다. 당시 삼문SFC에는 집에 안 가고 교회당에서 사는 특수부대(?)가 있었는데, 3층 골방에서 밤새워 주보 등사 원지를 긁고(130장을 등사하려면 150장 앞면을 먼저 밀고 뒷면을 밀었는데, 원지가 찢어지면 철필로 다시 긁었다. 그러자면 해가 뜨기 일쑤였다) 새벽기도 종을 쳤으며(사찰이 없는 시절이어서 서로 종을 치려 했다) 집에는 옷 갈아 입으러 갈 정도였다. 박대복 동문은 40일 금식기도를 두번씩이나 했다. 배동환 위원장 등 3명은 영남알프스 호박소 부근 팔복산 기도원에 일주간 금식기도를 하러 가서(아예 양식을 가지지 않고 갔다) 사흘을 굶고 나서 원장의 만류로 [2011.3. 배동환 동문 증언]
2000년 창립된 삼문SFC동문회 회원은 매년 8월 15일 모교회서 모이고 있다. 회원은 130명 정도. 초대회장 정용부 장로, 2대 강종태 장로와 김재용 김상용 김수읍 밝나라 박대복 박호준 등 동문이 발기하여, SFC 장학금, 모교회로 선교헌금 보내기, 단장면에서 친목회를 갖는 등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2011.3.2 상임총무 박호준 장로 증언]
88년 5월 4일 가술교회 출신의 이동진 운동원은 철원 15사단 ROTC 중위로 복무하며 지뢰 매설 작업 중 강풍으로 떨어진 위장물이 뇌관을 치는 것을 보고 '엎드려!' 하고 소리친 후 온몸으로 덮쳐 14명의 생명을 살리고 산화하였다. 사단 교육장과 부경대에 추모비가 있으며 동상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지금도 필자 서재에는 이동진 운동원의 월부 판매 서적이 남아있다.[2010.2.15 부친 이영실 은퇴장로 증언]
이동진 대위의 수산대(부경대) 학우였던 박시영 목사는 대추와 팜스테이 녹색마을로 유명한 단장면의 통합측 연경교회 출신이었지만 고신 출신의 목회자를 만나 무릉 삼거 태동교회 SFC맨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저절로 수산대 SFC맨이 됐다. 부산USFC위원장 역임, 전국학신보를 편집하고 위원을 거쳐 밀양마산교회에 시무하며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 총무, 산돌손양원목사생가복원사업회 사무총장, GSFC 이사로 있다. '엡시맨'이란 말을 공식화한 인물이다.
경남중부지방에 속한 밀양동지구와 서지구는 지금(2011년)도 지구 조직이 있으며 동기수양회 찬양대회 개학부흥회 여름수련회 순회예배 체육대회 등 격월로 정기모임을 하고 있고, 교회마다 SFC라는 이름을 쓰고 학업충실 학원전도 교회봉사 등의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2010.2 예림중앙교회 임우진 전도사 증언]

신현호(합동측 서울 금천구 한빛교회 안수집사 010-9700-7537)동문에 따르면 활동이 미미했던 밀양지구 재창립을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동기수양회 독려를 겸하여 28개 교회를 순회했다 한다. 고려신학대학에 입학해 밀양지구 위원장으로 지방 수양회에 갔더니, 마산 위원들이 물러서 있으라고 권고했으나 위원(지방서기)이 되었다. '소년부'라고 불리던 고1 때(1965) 예림중앙교회에 SFC가 창립(이인봉 장로, 김원수 장로, 박대용 목사 등 주도), 우리만 해선 안되겠다 하여 삼문교회 이상문 김수읍 등과 수산, 마산 박성철, 외산 신상현 등과 삼문교회서 창립총회를 했다. 전국 수양회는 잘 못가고 지구 수양회를 큰 교회 중심으로 개최했다. 무안의 강신명, 무릉의 이세연(장로), 수산의 김정곤(목사)가 많이 도와주었다.[2011.2.21 증언]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조회
  • 1
  •  밀양지구SFC 인맬을 더듬어
  • 2011-05-11
  • 김종화장로
  • 4702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