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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지구SFC 인맥을 더듬어2

  • 김종화장로
  • 조회 : 4044
  • 2011.05.11 오후 10:19

밀양지구SFC 인맥을 더듬어②

신상현 목사의 증언[2011.2.14]에 따르면, 1960년대말 함께 활동하던 벗들로는 김수읍(서울안디옥교회/통합) 김정곤(수산) 김덕태 강은중 이명우 이세영(무릉/장로) 손인식(일동) 김종덕(외산/오산) 박성철(장로) 박정희(마산/대구남부 권사) 김지태 이영애(무릉/사모)가 기억이 나고, 자신이 1968~9 금창지구(당시 위원장: 정수생/신전교회)에서 분리된 밀양지구 초대위원장을 역임했다 한다(2대 이명우, 3대 김덕태). 당시 지도위원으로는 김종한(김영동) 원종록 김종삼 목사이며, 위원들이 들길을 걸으며 개체교회를 순회하여 동기수양회를 원종록 강도사를 강사로 무릉교회에서 개최했는데 영적인 분위기가 뜨거웠다. 68년경 마산교회에서도 개최했는데, 박정덕 목사가 빌1:21-4 '바울의 삶의 목적- 살든지 죽든지 복음 위해 교회 위하여'란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운동원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고 한다. 신상현 동문은 조모님(배은숙 전도사)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창녕경찰서에 피검되어 고초를 겪은 3대째 신앙의 가문으로 급성늑막염을 앓고 목회자가 되기로 서원, 신학생이 되어 충일교회 가덕대항교회 외산교회 등에서 사역하는 바람에 학신운동 기간이 길지 못했다.
박성철 동문에 의하면, 1960년대 초 마산교회SFC 인물은 이정대(장로) 이정현(목사/재미) 박종태(장로) 손용수 박성철(장로) 이정철 서성진 김무용 박정희(권사) 이혜숙(권사) 이정애 차정덕 이정필 강순선 박정숙(권사) 이정미(사모) 강윤선 등이며, 이웃 예림중앙교회의 신현구 신현호 신현숙 이명우 김덕태 박신애 김성화 등과 함께 활동도 하고, 자매교회인 외산교회와 연합집회를 가져 신상현 동문의 피아노 반주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불렀던 일을 좋은 신앙의 추억으로 갖고 있다. 당시 세종고SFC중창단 멤버인 신상현 김덕태 박성철 동문이 '저 못 속의 맹꽁이 트랄랄랄라'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신을 담벼락에 숨겨서 사랑방에 운동원들이 모여 군불을 때고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친교의 시간을 가지고, 무척산기도원에서 기도회를 갖기도 하고, 삼랑진 포도밭에서 포도를 실컷 먹으며 돌아온 기억도 갖고 있다.[2011.2.16]
무릉교회 출신으로 이기우(장로) 이세영(장로) 김정연 김계화 이영애(김삼송 목사 부인) 김영주(동산교회 사모) 이영일 김문복 박상호 김규섭(장로) 김순태(장로) 김경화 등의 엡시맨이 있다. 이세영 동문은 성공적인 중농가로 모교회를 섬기고 있다. 김수읍 동문이 밀양지구 20여 명 운동원들을 인솔해 대구 기도원으로 갔던 일이나, 김호용 강은중 동문과 함께 지방과 지구수양회 공보부 일을 했던 일이 좋은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2011.2.16 김문복 동문 증언]
70~80년대 가술교회는 SFC 초기 인물인 김동철 목사의 지도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학원복음화를 위해 등교시 교회 가서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 학업충실 운동과 기도회, 환경정화와 청소, 자발적인 초청수련회 개최, 경남지방 알돌수련회 등에 열성적으로 참석하고, 선교음악회를 여는 등 대산중고등학교를 중심한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운동이 이루어졌다. 의창군 지역(수산 다리 건너 모산 일동 자여 진영까지)이 다 모이는 학교였다. SFC 정신은 신앙운동의 원동력이었다. 당시 인물로는 오미자 오영애(사모) 김정미 허윤희(권사) 박희도(삼일교회 장로) 김종기(목사) 박희섭(호산나교회/장로) 차원자 진영순 이두레 김한주 김화식 김종식 김말숙(사모) 김미애 김영희(최초의 여자 위원장) 진은대 이동진 김현식(성악가), 김성일(군목제대) 김종은(고신대 홍보팀장) 이성열 김추현(SFC간사/목사) 등이 있다.[2011.2.17 김영희·김종은 동문 증언]
장영돈 동문은 1981년 박대성 지구위원장 시절, 박대성 장지열 정진욱 장영돈 이수기 손희철 동문이 지구순회 갔던 일을 신앙의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가술교회로 가면 김동철 목사님이 자전거 5대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셔서 자여 사산 동성 가동교회 등을 순회하며 수양회와 SFC주일을 홍보했다. 순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오성률 동문(변호사) 모친이 위원들의 식사를 준비하여 격려해 주셨다. 봄가을로 순회를 다녔는데, 산내면은 버스로 갔다. 삼거교회 조기덕 장로, 희곡교회 김복석 할머니(귀화일본인)가 수고한다며 많은 대접을 해 주셨다.[2011.3.4 증언]
삼랑진중앙교회는 1969. 6.14. 당시 경남지방SFC 지도위원이셨던 송요셉 목사와 잠시 출석했던 신현호 동문의 도움으로 SFC를 창립하게 된다. 김칠규,김현준,손호관,염명수,김종화,이종성,김성환,정영실,송활석,임무현,이경애,백기화,엄영심 등 초기 SFC 운동원들은 교회당 청소 및 울타리 전정, 화단 조성, 목회자 조력하기, 헌신예배, 밤샘 성경읽기, 목사관에서의 성경공부 등으로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76.8.15, 균형을 갖추지 못했던 SFC는 재 창립대회를 가지므로 16명의 운동원을 중심으로 SFC가 자리잡게 된다(재창립위원장: 김종화). 삼랑진중앙교회 SFC에서 중등부 시절을 보낸 송활석 목사는 SFC 벗들과 낙동강에서 손계현 장로 고기잡이 배로 재첩 잡아 국 끓여먹던 기억, 삼랑진 제방의 풀(수크령)을 묶어 발을 걸던 일, 매봉산에 올라가 칡넝쿨로 올가미를 만들어 산토끼 잡던 일, 메뚜기 잡고 콩서리하던 일, 철로 위에 대못을 얹어 두고 기차가 지나가면 가져다 칼을 만들던 일 등을 기억해 내고 있다.[2011.3.2]
밀양지구 역사 정리에 많은 도움을 준 박성철 선배의 밀양마산교회 이야기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조부(박윤선)께서 116년 전 누님 위독 소식에 아우(박건선)와 하루를 걸어 창녕으로 문병을 갔더니 "윤선아 왔나? 이 병으로 인해 살지는 못하겠다. 너거들도 내가 믿는 야소를 믿고 후직에 천당 가서 만나자"..손을 잡고 눈물로 하직하고 돌아와 형제가 누님 믿는 야소를 믿어보자고 마음을 모아 살던 초가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동네에서는 귀신 염병이 들어와 재수없다고 침 뱉고, 돌도 던지고, 추방하려고도 했다. 천성이 어질고 순하여 전도 품앗이를 했다. 콩밭에 가서 아침부터 밤까지 콩밭 매어 주고 예배에 초청을 했다. 찬송을 하고 있는데 젊은이(이인재 목사)가 "어르신, 저도 예수 믿어도 되겠습니까?" " 아이고 자네 같은 사람이 예수 믿으면 얼마나 좋겠노" 그 뒤 이인재가 자기 부친을 전도하였다. 당시는 담뱃대를 허리에 차고 한 대 피우고 초가 처마에 꽂아두고 예배 후에 둘러 앉아 또 한 대씩 피우고, 남·녀반은 거적으로 가리고 예배하였다, 금동에 살던 한학자요 침술가인 박수민 장로가 전도를 받으니 동네 사람들이 똥물을 퍼부어 오산으로 이거했다. 의원이 없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침술 덕을 보았다. 예원배 선교사가 방문, 조부를 영수로 세워 웅천의 논 도지 얻기를 주선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여기서도 복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섬기며 살겠습니다"하며 두부를 만들어 팔아 칠남매 공부를 시켰다. 피죽 먹고 살던 시절, 나락 훑어 찧어 쥐가 먹을까봐 주머니에 넣어 천정에 달아 두었다가 선교사가 오면 쌀밥을 지어 대접하였다. 어렸던 부친(박기준 장로)이 "엄마 엄마 쌀밥 좀 도고" "이노무 자슥아 조금 있어 봐라 남기면 주꾸마" 부엌문에 침을 발라 보았더니 남기지 않고 물을 부었다. "엄마 밥그릇에 물 부었다" 할머니가 입을 막고 뒷간서 달랬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할머니가 가시가 걸려 목이 부어 음식을 못 넘기고 바짝 말라 죽을 날만 기다렸다. 조부가 만댕이밭에 똥추무리(장군) 지고 가니 몇 번씩이나 쉬면서 따라 올라가 기도하던 바위에 지게 받치고 기도하는 순간에 기침 세 번 하고 뼈가 튀어 나왔다. 주먹만한 게 나와 가져 내려와 그 뼈를 박손혁 목사가 가지고 다니며 간증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잠 자다 마당에 나가 보니 조부께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초가 집 높이만큼 올라가고 계셔서 가족이 부르니 내려왔다. "바람 타고 천당갈텐데 너거들 땜에 다부 내려왔다" 하셨다. 조부(박윤선 영수)께서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박해받을 때, 밀양경찰서에 욕 잘하고 사람 잘 패기로 유명한 순사가 있었는데 짐승보다 못한 친일파로, 신발을 신고 교회당에 들어와 "니가 박윤선이냐 일라서라 반대하면 총을 갈기겠다" 고 했다. "저 어진 어른이 그만 손을 안 들겠나" 하고 한상동 목사 부인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예수 몸이다. 쏠테면 쏘라" 고 조부가 외치자, 사모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아버지(박유덕 장로)는 1933년 집사 임직을 받고 40 안 돼 장로가 됐다. 욕쟁이순사가 "한상동 연락병 니가 주도를 다 했다면서!"하며 심하게 패고 상처가 나을만 하면 또 불러 패고, 밀양 장날 속옷바람으로 앉혀놓고 행인들에게 침을 뱉으라고 했다. 그 때가 여름인데 침뿐 아니라 가래침까지 뱉는 바람에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래도 매 맞는 것보다 낫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숨은 순교자 민집사는 많이 맞아 골병이 들어 천국 갈 시간이 임박하자 "친구야 내가 살지 못하겠다. 내 아내를 부탁하네" 하곤 맞은 자리 다리가 썩어 돌아가셨다. 부인이 부산으로 나가 수영교회에 출석했는데, 부친이 6,70년간 돌보셨다. 부친께 잡비를 드리거나 반지를 해드리면 얼마 안 돼 없어졌다. 그 부인이 2002년도쯤 별세하셨는데 아들이 '예수 믿고 우리 아버지가 맞아죽었는데' 하면서 부산서 유명한 깡패 두목이 되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한상동 이인재 손양원 목사 등 출옥성도가 오실 때 갓골로 흰두루마기 입고 천사 같이 손 흔들고 왔다. 돼지 잡고 환영회를 했는데 손양원 목사께서 설교를 했다. 천국서 하루 생활하듯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의 도가니가 됐다. 여기가 천당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로 부퉁켜 안고 기뻐 울고 원통해 울고 서로서로 예수 잘 믿고 믿음으로 살자고 다짐하였다. 그 잔치는 며칠간 계속되었다. 온 동네가 다 구경을 왔는데, 구경 온 사람 모두 국밥을 먹여 보냈다. 수 년간 손양원 전도사가 수산교회와 평촌 마산교회 어린이를 가르쳤는데, 키가 자그마만 분이 무용을 잘 하고 성대가 좋아 노래 잘 가르치셨다. 박영수 아랫방에 주무셨다. 박손혁 목사가 청년 시절 생활이 어려워 신학을 못 하게 되어 쉴 때에 선교사 한 분이 일부러 화단에 돈이 많이 든 지갑을 흘려놓았는데 화단에 일하던 목사님이 지갑을 주워 주인을 찾아 주는 걸 본 선교사가 "나하고 함께 가자"고 하여 신학을 계속했다. 한상동 목사는 주일마다 삼랑진역에 내려 낙동 뒷기미 나룻배를 타고 들판길로 왔다. 배가 고파 수확을 끝난 배추 뿌리를 빼 먹은 게 마음에 걸려 설교를 못하고 뒷산에 올라가셨다. 교우들이 화장실까지 뒤진 다음 산에 가니 소나무 앞에서 설교하고 계셨다. '나 같은 도둑놈이 부끄럽다'는 그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마산교회 sFC 위원장 시절 남녀간 모여 지내는 게 좋았다. 사치기와 전기놀이도 하고 마당에 묻어둔 무 고구마 빼서 깎아 먹고, 파전 구워 먹고 참새 잡아 구워먹고, 풍금 들고 양지쪽에 10분씩 치고 하다 반주자가 됐다. 주일 어른들 몰래 배구하다 들켜 네트 걷어 뒷간에 숨긴 일, 주일에 차 타지 말라 제기차기 구슬치기 하지 말라 하여 자취하던 운동원들이 함지 싣고 가던 트럭을 얻어 타고 가다 전복된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 덕으로 요즘도 주일 개념은 확실하다. 옷 벗고 남천강을 건너 미전 백장로댁 포도밭에 가서 너무 많이 먹어 취해서 벌겋게 돼서 비틀거렸던 기억, 그래도 예배와 기도는 뜨거웠고..성탄이브 밤샘, 얼마 이상 금액을 정해 선물교환할 때 큰 박스를 지게에 지고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당첨되면 달랑 양말 한 켤레..새벽송 나갈 때 산타 선물자루를 숨겨뒀다 운동원끼리 시간을 가지며 나누어 먹던 일, 수양회 갈 때의 재미. 때묻은 담요 들고 수산 가술 무릉 예림중앙교회로 들고 다니던 그 즐거움. 수산교회 수양회 갔을 때 방이 없어 곤란할 때 안영희 장로(당시 집사)에게 시집 간 이다남 집사가 데리러 와서 이불 덮고 뜨듯하게 잘 쉬었던 추억도 있다. 당시 퀴즈대회를 했는데 아무리 준비를 해도 김정곤(수산/목사) 학생이 나오면 기를 못 폈다. 주보 차례를 받아 철판 긁어 등사하다 손과 옷에 잉크 묻히던 기억, 읍내 삼문교회에 가서 차이 옷차림도 차이가 나고 얼굴도 새까맣고 하던 우리를 강종태 선생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일, 호두나무 밑에서 말씀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던 일, 저녁 놀이 때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찬송을 불렀는데 '길이~ 살겠네' 부분에서 길게 빼어 앵콜을 받았다. 대학을 마치고 25세 때 읍내서 화장품 대리점을 하면서 삼문교회 성가대 지휘도 맡고 SFC 지도교사가 되어 공과책을 보고 준비하여 설교도 하고 후배를 가르쳤다. 성가경연 야외 운동 철야 등을 했던 기억이 난다. 김종철 박대성 이상신 이상인 학생은 목사가 되었다. 김선규 목사님이 사택에 불러 학생들 데리고 무슨 철야냐고 야단하신 기억도 난다. 학생이었던 김재용 선교사가 '박집사님 설교 대빵이에요!' 하던 일도 생각난다.[2011.2.18 증언]

1967년생으로 금천교회 출신인 김성일 동문(구미남교회,안수집사)학원장)은 '89 (23세) 경북대(화학) 3학년 때 지구위원장을 지냈다. 당시 부위원장은 차기위원장(삼문), 김나영(금곡교회,복음간전) 동문. 이상문(수산) 백성현(수산,신학 후 목회) 김성재(금천,창원대) 동문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진상원 - (안창주) - 이상문 - 김성일(27대?) - 으로 위원장의 계보가 이어진다. 위원장 시절 삼문교회당 지구하기수양회에 3백여 운동원이 모였다. 무안동부 삼랑진중앙(편윤남-중국 선교사,박천진 부위 역임) 예림중앙 수산교회 등에서 연합예배로 모였다. 21개 교회를 순회 위원 4인이 토,일 날짜를 잡아 한 달에 걸쳐 순회를 했다. 산외 산내 쪽, 무안 쪽, 마산 백산 오산 수산 귀명 쪽으로 버스 이용했고. 가까운 곳은 걸어서 갔다. 이듬해는 밀양마산교회서 하기수양회를 개최했다. 창원한빛교회 지방수양회와 전국수양회에도 참가했다. Sfc란 젊은이에게 믿음의 기준을 잡아주는 좋은 모임이라 생각한다는 김 동문은 중2 때 지구수양회(수산)에 참석하여 헌신을 서원한다. 수양회를 앞두고 가지산 팔복기도원으로 위원 6명이 금식기도하러 갔다가 늦게 도착하는 위원이 먹을 걸 자뜩 사오는 바람에 한 끼밖에 금식하지 못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2011.3.29 증언]

1968년생으로 귀명교회 출신인 김주영 동문(장영돈 목사 부인,지구 부위원장,지방 회계 재선)은 조모가 개척한 귀명교회에서 주교시절을 보낸다. 이사장이 장로였던 수산 동명중 재학시 기독학생회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던 중 장영돈 전도사의 부임으로 SFC를 알게 되고, 지구수양회(평촌마산, 예림중앙) 전국수양회(광주 경신여고) 지방수양회(제일진해 한빛교회)에 참석한다. 밀양여고 재학시 귀명교회 학생집회가 토요일이어서, 2시에 시작하는 삼문교회 SFC에 참석한다. 당시 삼문교회는 장년 2백, SFC 60여 명으로 학생성가대가 있었고, 자체수양회를 여름 강변에서 열 정도였다. 지구 부위원장 시절, 위원장은 김성일, 남부위 ?, 회계 남정미(예림중앙)로 기억된다.
다음 회기 위원장 ? 부위 김정선(금천)이 기억난다. 인도네시아 선교지에 7년간 있으면서 어느 선교훈련보다 SFC에서 받았던 훈련이 정말 유효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SFC출신이 아닌 선교사들은 '어떻게 그런 좋은 단체가 있었느냐?'며 부러워할 정도였다. 지구위원 시절 삼랑진중앙교회로 열차 타고 순회 갔던 일, 교회를 순례하며 위원회를 열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2011.3.29]

1959년생으로 무안동부교회 출신인 강미화 동문(부민교회,권사)은 중등부 시절 진해남부교회 지방 수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체험하고 SFC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무안고 1학년 때 혼자서 국기에대한경례를 하지 않아 어여움을 겪다 자퇴를 하였다. 3대 신앙의 가문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사람에게 절 할 수는 있어도 국기나 물건에게는 안 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터였다. 더구나 키가 작은 편이라 맨 앞에 서서 더 표가 났다. 한참을 쉬다 밀성여고 1학년에 재입학을 하여 국기경례 문제를 가슴에 묻어놓고 지냈다. 고교시절 구자우 지구위원장과 함께 부서기로 수고하였다. 예림중앙교회서 수양회 준비로 사흘간 밤샘을 하기도 했다. 구자우 대회장이 주기도문 대신 사도신경을 외는 바람에 당황했던 기억도 갖고 있다. "sfc가 좋은 게 주일날 의례적 예배보다 연합 집회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수양회 참가를 권하게 되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이땅에 가장 중요한 것, SFC는 교회서 줄 수 없는 것들을 채워준 신앙의 요람이었다. 그래서 요즘 학생들에게는 옛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일하던 열정이 부족해 보인다. "당시는 오직 교회에 가면 SFC 그 일밖에 없었다.혼자 가서 철야를 하고 했으나 오히려 요즘은 잘 하지 못한다"고 SFC시절을 회상한다. 미국생활을 하면서도 SFC에서 배운 'SFC타임'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함께 일한 동지로 박종규(밀양마산교회 출신/목사/부위원장)이 기억에 남아 있다. 지방 수양회에 찬송가대회에 나간 기억도 있다. 무안동부교회 SFC를 창립한 사촌오빠 강신우, 사촌언니 강신향, 강신율, 강신재 동문이 한 집안이다.[2011.4.6 증언]

19**년생으로 일동교회 출신인 박혜성 동문은 월 1회 지구 모임(순회예배)이 있었는데, 김두영 위원장(현 목사)과 함께 부위원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역사는 인간에게 하나님나라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이다(한성국 목사 '평화성서사랑방 교재'). 그 열정은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SFC 역사도 마찬가지다. SFC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열정이다. 신실한 SFC맨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나라를 결정적으로 이루려 하신다.

* 김성일 집사 (금천, 1967년생) 010-3547-8385
* 강미화 권사 (부민, 1959년생) 010-9208-7233 2年피아노(경희대4) 성악1/29일만에 결혼- 서기(구자우) 박종규(부위/재미)
* 강신재 (무안 거주)
* 강신향 (서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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